Jul 13, 2026
예언서 역주행 후기
교만, 공의, 우상숭배, 그리고 새 창조
내가 속해 있는 교회 모임의 제안으로 올 1월부터 구약을 거꾸로 읽기 시작했다. 보통 성경읽기하면 창세기부터 시작하다 레위기 민수기쯤부터 막히고 역사서 겨우 좀 넘어가다가 예언서에서 또 막히고 이 패턴이 반복되니까, 차라리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부터 거꾸로 읽어보면 낫지 않겠냐는 단순한 의도였다. 평일 및 토요일 2장씩 읽고 주일과 빨간날은 휴식. 구성원 중 요청이 있을 경우 합의하에 진도를 늦출 수도 있다. 모임의 최연소자인 나는 매일 성경 진도를 공지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의도와 상관없이 거의 반강제로 성경을 읽게 되었는데(^^;), 우연의 일치로 상반기가 마무리될 즈음 딱 이사야서까지 끝났다. 학생 때는 성경 통독을 두어 번 한 적도 있지만 솔직히 수박 겉핥기였던 것 같고, 그나마 신약은 여러 번 들여다봤지만 구약은 분량도 난이도도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가장 장벽이었던 예언서(이사야~말라기)를 통째로 읽게 된 것이다. 이왕 예언서를 뗀 김에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읽는 과정
예언서는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진 분열왕국 시기부터 바빌론 포로를 거쳐 귀환 후 성전 재건 시기까지 수백 년의 시기 동안 다양한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고 있다. 나는 말라기부터 읽었으니까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이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온 시기부터 시간을 거슬러가며 읽은 셈이다. 예언서의 순서가 정확히 시간 순으로 배열된 것은 아니지만, 대략 비슷한 시기끼리 묶여있다.
귀환 이후 (말라기-학개-스가랴)
최악은 벗어난 것 같긴 한데, 여전히 내 삶이 팍팍할 때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 너희 중심을 돌아보고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 1:2)'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학개 1:4)’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고향 땅에 돌아왔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땅에서 삶의 기반을 새로 꾸미기란 만만치 않다.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는 하는데 당장 내 집 마련이 더 중요하고, 방심한 새 누가 여길 노리지는 않을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겨우겨우 씨를 뿌렸는데 수확도 변변치 않으니 제물에 신경쓸 여유는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한테 요구하시는 게 너무 많잖아.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맞는 걸까? 라고 의심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삶의 모습을 하나하나 들추신다. 하나님께 아무 제물이나 바쳐도 된다고 여기면서 은혜를 간구하고,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율법을 바르게 가르치고 적용하지 않았고, 성소를 더럽히고 이방신을 섬기는 이와 결혼하고,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 말하며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묻는 이들(말라기 1-2장)이, 과연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인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스가랴 1:3)‘
남유다 시기 (스바냐-하박국-나훔)
이딴 부조리한 세상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정말 만유의 통치자 맞나? - 왜 믿음이 필요한가 설명하시는 하나님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앗수르와 바벨론, 이집트 등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남유다 왕국. 그들은 매일같이 변하는 주변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활발한 외교 정책을 펼쳤고, 어떤 나라의 침략과 압제를 피하기 위해 다른 나라와 손을 잡아 하나님의 책망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저 악한 이들로부터 우리를 구해줄까? 우리는 어디로 붙어야 살 수 있을까?‘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믿음은 있지만, 실제 삶에서 마주하는 것은 의인이 더 빨리 망하고 악인이 득세하는 부조리가 훨씬 많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듣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 같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하박국 1:2-3)’
불경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하나님은 질문을 막지 않으신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박국 2:3)’
눈 앞의 현실을 매일 보면서도 하나님의 정한 때를 믿을 수 있을까. 무화가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우리에 양이 없어도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예언자도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받고서야 가능했던 것을, 나는 어떻게 여기서 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성경이 있는 것이다.
분열왕국 시기 (미가-요나-오바댜-아모스-요엘-호세아)
우리는 선택받은 백성, 이방인들과는 달라 - 정면으로 반박하고 변론하시는 하나님
구약 하면 제일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 편을 들어 이방 족속을 멸절하시는 하나님이지만 예언서의 하나님은 열방보다도 이스라엘을 아주 혹독하게 책망하시고, 이는 특히 예언서에서 도드라진다. 결혼과도 같은 유일한 언약 관계를 배신하고, 자기 이익에 사람을 팔고 약자를 짓밟으며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혔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해야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일마저 일어났다. 하나님은 열방의 죄에 분노하시듯 이스라엘의 죄에도 분노하시고, 아주 강한 어조로 심판과 멸망을 선언하신다. 너희의 절기도 성회도 제물도 모두 받지 않겠다고 단절을 선언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멸절이 아니라 회개와 돌아옴에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요엘 2:12-14)’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난미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아모스 5:15)’
하나님은 니느웨의 악을 보시고 그들을 심판하려 하셨음에도 요나를 보내셔서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십이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셀 수 없는 짐승들의 생명을 아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요나는 하나님의 이런 긍휼을 기뻐하지 않았다. 요나에게 니느웨는 그저 적이고 멸망당해야 할 존재였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억울함을 푸시며 원수를 갚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열방 전체까지 뻗어나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기원이 되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부터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창세기 12:3)‘이라고 말씀하셨다.
포로기 (다니엘-에스겔-예레미야/예레미야애가)
젠장,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됐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 영원히 노하지 않으시고, 갇힌 중에도 살 길을 주시며, 심판 뒤에 놀라운 계획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앞의 소선지서에 비해 포로기는 내용이 길고 많다. 순서대로 읽을 때는 보통 이 부분에서 나가떨어지곤 했는데, 거꾸로 읽으니 어떤 내용이 핵심인지 미리 알고 있어서 좀 편했다. 포로기는 이미 끌려가 고초를 당해서인지 회개하는 목소리가 강하다. (예레미야서에서는 죽어라고 회개 안하는 인간들이 엄청 나와서 속터지기도 한다, 왜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인지 알 것 같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 회개를 들으시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살 길을 마련해 주시고 이 심판이 영원하지 않다고 알려 주신다. 또한 앞으로 당신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회복하실 것인지에 대한 계획도 하나하나 자세히 보여주신다.
이사야
처음부터 모든 것을 품고 미리 알려주신 하나님
예언서의 첫 책을 마지막에 읽게 되었는데, 그동안 봤던 모든 것들-관계 단절, 열방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긍휼, 구원-이 다시 나오면서 하나님의 가장 큰 계획인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 창조에 대한 설계도가 나온다. 새 창조의 주역이 될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 지파를 모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뿐만 아니라 이방의 빛이 되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습보다 훨씬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모양으로 와서 백성의 모든 죄를 대신 감당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두가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자리에서 종을 지극히 높은 보좌로 올리셔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로 세우신다. 하나님 나라의 최종 모습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경배하러 나아오는 것이다(이사야 66장).
읽으며, 읽고 나서 했던 생각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내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성경 말씀 속 단어를 하나하나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예언서를 읽으며 제일 많이 본 단어는 ‘정의’ 혹은 ‘공의’였던 것 같다. 언급한 미가 6장 8절의 말씀은 사람이 높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할 때 무엇을 드릴까 고민하는 대목 바로 뒤에 나오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장 받고 싶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신다. 레위기 같은 율법서를 통해 제사의 방식과 각 제사에 적합한 제물을 하나하나 정하신 분이 하나님인데, 왜 그 제물보다도 정의를 구하시는가? 하나님이 정의롭고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가 답이긴 할 것이나, 좀 더 내 안에서 납득가는 답을 내기 위해서는 반대로 하나님이 선하지 않게 여기시는 것이 명확해지고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과 연결되어야했다. 하나님의 정의와 반대되거나, 정의를 파괴하는 게 뭘까? 일반적으로 정의의 반대는 ‘불의’ 혹은 ‘악’이겠으나 이번에 내가 주목하게 된 단어는 희한하게 ‘교만’이었다.
처음부터는 아니었지만, 예레미야서와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교만이라는 단어가 자꾸 신경이 쓰여 몇 편의 메모를 쓴 적이 있다(예레미야 완독,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교만, 교만과 분노의 관계?, 왜 하필 모압일까). 앞선 글들을 종합하면 나는 교만을 1) 실재와 주관을 가리지 않고 아무튼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소유/지위/능력 등’에 근거하여 스스로 안정감을 얻고, 2) 자신의 성취가 향유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 믿으며, 3) 자기보다 뒤떨어진 이들을 무시하고 자격/노력 없이 자기에게 근접해질 것으로 보이는 이들을 혐오하며 분노를 쏟게 되는 원인으로 규정했다. 일반적으로 교만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경우에 따라 공동체의 집단적 속성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하나님이 예언서에서 지적하신 교만은 개인보다는 나라 혹은 민족, 그 지도자에게 향해 있었다.) 오히려 집단이기 때문에 힘이든 자원이든 더 모을 수 있고, 머릿수가 만든 체제가 작동한다는 효능감이 있고, 약자 혹은 타자를 배척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랑’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받을 만한 사람에게로 한정되고, 긍휼은 특혜가 되며, 이득을 독점하기 위한 발버둥은 커져만 간다. 그 과정에서 나 혹은 우리의 바람을 도와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갈구하게 되고, 끝내 자기 힘으로 그것을 만들어낸다. 바로 우상이다. 처음에는 스스로를 위해 우상을 만들었고 통제할 수 있었지만, 우상이 좋은 것을 줄수록 우상에게 종속되고,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우상에게 끌려다니게 된다. 그러니 사회적 정의도, 신앙적 정의도 다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의 교만은 비슷한 형태다. 약자를 돌보지 않고, 거짓 판결을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 심지어 우상 숭배도 둘 다 했다. ‘여호와는 신들 중의 하나고 우리 신에 비하면 별 거 아냐’이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선택받았으니까 하나님 잘 믿고 있는 거야’ 정도만 달랐을 뿐이지.
예언서에서 다루는 수백년의 세월 동안 이스라엘이든 이방 민족이든 사람이 보이는 교만의 패턴은 참 비슷하다. 어쩌면 구약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사람들에게 그들이 듣든 듣지 않든 회개하라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고,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것 같다. 안 듣는 이들에게는 심판도 주시지만, 그럼에도 전부 다 망하게 하지는 않으시고, 꼭 누군가를 남기셔서 그들이 본질적으로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또한 말씀으로 예고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보내주셔서 공생애를 통해 새로운 창조의 실마리를 일부 보여주시고, 언젠가 다시 오실 그때까지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있도록. 오늘도 하나님은 기다리시고 말씀하시고 움직이신다.